이란은 한때 중동에서 미국의 가장 믿음직한 동맹이었다. F-14 전투기를 팔 만큼. 지금은 그 비행기 부품조차 제재로 구할 수 없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됐을까. 두 나라의 관계는 단순한 외교 갈등이 아니다. 쿠데타, 혁명, 인질극, 전쟁 지원, 핵 개발. 70년이 넘는 얽히고설킨 역사가 오늘의 적대를 만들었다.
1장. 우방의 시절 — 냉전이 만든 동맹 (1950년대~1970년대)
1953년, 미국이 이란에서 한 일
미국과 이란의 관계를 이야기하려면 1953년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해에 미국이 한 일이 이후 70년의 관계를 규정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란의 총리는 모하마드 모사데크였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그는 한 가지 일을 추진했다. 영국 석유회사(APOC, 오늘날 BP의 전신)가 독점해온 이란 석유를 국유화한 것이다. 이란의 석유는 이란 것이어야 한다는 당연한 주장이었다.
영국은 격노했다. 그리고 미국을 끌어들였다. 1953년 CIA와 영국 정보부(MI6)는 공동으로 쿠데타를 획책했다. '아작스 작전(Operation Ajax)'. 모사데크 정부는 무너졌고, 팔라비 왕조의 모하마드 레자 샤(황제)가 권좌를 되찾았다.
미국의 명분은 공산주의 확산 방지였다. 냉전의 논리였다. 하지만 이란 민중의 눈에 보인 것은 달랐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자국 정부가 외세에 의해 뒤집히는 장면이었다. 이 기억은 이란인들의 집단 무의식에 깊이 새겨졌다.
팔라비 시대 — 중동의 미국 대리인
쿠데타로 권력을 굳힌 팔라비 왕조는 철저한 친미 노선을 택했다. 미국은 이란을 '중동의 경찰'로 키웠다.
군사 협력은 물론이고, 미국은 이란에 F-14 톰캣 전투기를 팔았다. 당시 최첨단 전투기였다. 동맹국에도 잘 팔지 않던 무기였다. 이란은 미국 외에 유일한 F-14 운용국이었다. 두 나라의 밀착도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실이다.
팔라비 황제는 '백색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급속한 서구화·근대화를 추진했다. 여성 참정권, 토지 개혁, 교육 확대. 겉으로는 진보적이었지만, 내면은 달랐다. 비밀경찰 사바크(SAVAK)는 반대파를 잔혹하게 탄압했다. 부정부패는 만연했다. 근대화의 과실은 소수 엘리트에게 돌아갔다.
성직자들은 서구화에 반발했다. 민중은 빈부 격차에 분노했다. 지식인들은 독재에 질렸다. 그리고 이 모든 불만의 끝에는 하나의 이름이 있었다. 미국.
2장. 혁명의 해 — 1979년, 모든 것이 뒤집히다
호메이니의 귀환
1979년 1월, 팔라비 황제는 이란을 떠났다. 사실상의 망명이었다. 그리고 2월, 14년간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루홀라 호메이니가 귀국했다.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와 그를 맞았다.
호메이니는 이슬람 공화국을 선포했다. 신이 다스리는 국가. 서구식 민주주의도, 세속주의도 아닌 이슬람 율법에 기반한 신정 체제였다. 4월 1일,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 공식 출범했다.
혁명의 구호는 하나였다. "미국도, 소련도 아닌 오직 이슬람."
대사관 인질 사건 —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다
그해 11월 4일, 테헤란의 미국 대사관에 이란 과격파 학생들이 난입했다. 외교관 52명이 인질로 잡혔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팔라비 황제의 송환이었다. 미국이 암 치료를 이유로 그의 입국을 허가한 것에 대한 분노였다.
인질극은 444일 동안 이어졌다. 미국의 구출 작전은 실패했다. 카터 대통령은 이 사건으로 재선에 실패했다. 인질들은 1981년 1월, 레이건 취임 직후에야 풀려났다. 두 나라는 공식 단교했고, 지금까지 대사관을 상호 폐쇄한 상태다.
이 사건은 단순한 외교적 사건이 아니었다. 미국과 이란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순간이었다.
3장. 적의 적을 돕다 — 이란-이라크 전쟁의 아이러니 (1980~1988)
1980년,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했다. 혁명으로 혼란스러운 이란을 손쉽게 제압할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8년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됐다.
미국의 입장은 복잡했다. 공식적으로 중립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라크를 지원했다. 이란이 혁명을 수출하며 중동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라크에 정보를 제공하고, 이라크가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것을 알면서도 눈을 감았다.
그런데 동시에 미국은 이란에도 무기를 팔았다. 극비리에. 이 사실이 나중에 폭로되어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터졌다. 레이건 행정부의 최대 스캔들이었다.
두 나라의 관계가 얼마나 복잡한 이중성을 가지고 있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다.
4장. 제재와 고립 — 핵 문제가 터지다 (1990년대~2000년대)
냉전 종식 이후 이란은 국제사회에서 더욱 고립됐다. 클린턴 행정부는 이란을 '불량 국가'로 규정하고 강력한 경제 제재를 가했다.
2002년, 이란의 비밀 핵 시설 존재가 폭로됐다. 나탄즈 우라늄 농축 시설과 아라크 중수로. 이란은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이 목적이라고 주장했지만, 서방은 믿지 않았다. 핵 문제는 미-이란 관계의 새로운 핵심 갈등으로 부상했다.
2005년 강경 보수파 마무드 아마디네자드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됐다. 그는 이스라엘을 지도에서 지워야 한다는 발언으로 국제사회를 충격에 빠뜨렸고, 핵 개발 의지를 노골화했다.
부시 행정부는 이란을 '악의 축'으로 규정했다. 이라크, 북한과 함께.
5장. 핵 합의와 파기 — 희망과 절망 (2015~2018)
JCPOA — 한 번의 봄
오바마 행정부 들어 관계의 물꼬가 트였다. 2015년 7월, 역사적인 이란 핵 합의가 체결됐다. 정식 명칭 포괄적공동행동계획(JCPOA). 이란은 핵 활동을 제한하고, 서방은 경제 제재를 해제하는 빅딜이었다.
이란에 외국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유럽 기업들이 이란 시장에 뛰어들었다. 온건파 하산 로하니 대통령은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 짧은 봄이었다.
트럼프의 파기 — 다시 원점으로
2018년 5월, 트럼프 대통령이 JCPOA 탈퇴를 선언했다. "역사상 최악의 협상"이라고 부르면서. 최고 수준의 제재가 복원됐다. 이란 경제는 다시 직격탄을 맞았다.
이란은 핵 활동을 재개했다. 우라늄 농축 수준을 높였다. 강경파가 힘을 얻었다. 온건파의 입지는 좁아졌다.
2020년 1월, 미군이 이란 혁명수비대의 최고 사령관 카셈 솔레이마니를 드론으로 암살했다. 이란은 이라크 주둔 미군 기지를 미사일로 공격했다. 두 나라는 전쟁 직전까지 갔다.
6장. 2025~2026년 — 전쟁과 협상 사이
2025년 6월, 이스라엘과 미국이 이란 핵 시설과 군 지도부를 공습했다. 최고지도자 알리 하메네이가 이 공습에서 사망했다. 이란은 걸프 지역 미군 기지와 이스라엘에 미사일로 보복했다.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며 세계 원유 수송이 마비됐다.
그리고 2026년, 두 나라는 협상 테이블에 다시 앉았다. 하지만 앞서 다룬 것처럼, 이란 내부의 분열(외교라인 vs 혁명수비대)이 협상을 가로막고 있다.
결론 — 70년의 원한, 그 뿌리를 보다
미국과 이란의 갈등을 단순히 '나쁜 나라 이란 vs 민주주의 미국'으로 보면 본질을 놓친다.
이란인들의 집단 기억 속에는 1953년 쿠데타가 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미국의 공작으로 무너진 그날. 팔라비 시대 수십 년간 미국의 지원을 받으며 자국민을 탄압한 비밀경찰의 기억.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미국이 이라크 편을 든 것. 제재로 인한 경제적 고통.
미국의 시각에서도 이란은 우방을 배신한 나라다. 인질 444일, 중동 혼란을 수출하는 신정 국가, 핵 개발, 테러 조직 지원.
두 나라 사이에는 단순한 정치적 이해관계의 충돌을 넘어, 수십 년에 걸쳐 축적된 불신과 상처가 있다. 그것이 협상을 어렵게 만들고, 관계 정상화를 요원하게 만드는 진짜 이유다.
한때 F-14를 같이 날리던 두 나라는, 지금 핵폭탄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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